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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내양은 왜 사라졌을까? “오라이”를 외치던 1970년대 한국의 버스 풍경

by Noxowl 2026. 10. 13.

“오라이!” 버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출발을 알리던 사람이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의 시내버스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승객들로 가득 찬 버스에 사람들을 태우고, 차비를 받고, 문이 닫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젊은 여성.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버스 안내양 또는 여차장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에 오르면 그만이지만,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승객의 탑승부터 요금 수납까지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버스 안내양은 1960~1970년대 한국의 대중교통을 움직인 중요한 노동자였지만, 1982년 시민자율버스의 등장과 승차 방식의 변화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버스 안내양은 왜 사라졌을까? “오라이”를 외치던 1970년대 한국의 버스 풍경
버스 안내양은 왜 사라졌을까? “오라이”를 외치던 1970년대 한국의 버스 풍경 (AI 로 만든 이미지)

 

버스 안내양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장면은 아마도 버스 출입문에서 외치던 “오라이”라는 말일 것이다. 영어의 'All right'에서 유래한 이 말은 승객의 승하차가 끝났으니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진이나 옛 영화 속에서 보이는 명랑한 표정만으로 이 직업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루 대부분을 좁은 버스에서 보내고, 만원 버스의 출입구에 매달린 채 일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요금을 잘못 계산했다는 의심을 받거나 승객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버스 안내양이 사라진 역사는 단순히 옛날 직업 하나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부족한 대중교통, 젊은 여성들의 노동, 그리고 버스 운영 방식이 달라진 과정을 함께 담고 있다.

버스 안내양은 언제부터 한국의 버스에 등장했을까?

한국에서 버스 안내원이 활동한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931년 서울에서 유람버스가 운행될 당시에도 버스 안내원이 등장했다. 따라서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1961년에 처음 생겼다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여성 버스 안내양이 대규모로 등장한 계기는 1961년의 제도 변화였다. 그 이전에는 남성이 버스 차장이나 조수 업무를 맡는 경우가 있었다. 1961년 서울 시내버스의 안내 업무가 여성 중심으로 바뀌면서 젊은 여성들이 대거 채용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농촌을 떠나 서울과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공장과 상점, 사무실이 밀집한 지역으로 매일 수많은 사람이 이동했다. 대중교통 수요는 커졌지만 이를 감당할 시설은 충분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1968년 11월 전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버스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버스는 시민의 출퇴근과 통학을 책임지는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출근 시간의 시내버스는 흔히 '콩나물시루'에 비유되었다. 차 안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서 있는데도 정류장에는 더 많은 승객이 기다렸다. 버스 안내양은 이런 상황에서 승객을 태우고 내리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버스는 지금처럼 모든 차종에 자동문과 정교한 요금 징수 장치가 갖춰진 환경이 아니었다. 안내양은 승객에게 목적지를 묻고 차비를 받았으며, 필요한 경우 거스름돈을 돌려주었다. 승객이 내릴 정류장을 알려주거나 출입문 주변의 상황을 살피는 일도 업무에 포함됐다.

승차 인원이 많을 때는 문이 닫힐 수 있도록 승객들을 안쪽으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버스 옆면을 두드리며 운전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는 모습은 이런 업무 과정에서 나온 풍경이었다.

 

버스 안내양이 된 여성 중에는 지방에서 도시로 올라온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농촌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거나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도시로 향한 경우였다. 특별한 자격이나 높은 학력을 요구하지 않는 직종이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여성들에게 하나의 취업 경로가 되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61년 버스 안내양은 1만 2,560명이었고, 이후 1970년대 후반에는 약 5만 명 규모까지 늘어난 것으로 소개된다. 지역과 집계 기준에 따라 연도별 인원에는 차이가 있지만, 당시 버스 안내양이 적지 않은 여성들의 생업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 안내원의 도입에는 정부가 강조하던 친절한 대중교통 서비스라는 목표도 작용했다. 2024년에 발표된 관련 역사학 연구는 버스 안내원의 여성화가 단순한 채용 변화가 아니라,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던 친절과 봉사의 이미지와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분석한다.

버스 안내양은 도시의 발전을 상징하는 직업이면서 동시에 여성에게 특정한 역할을 기대하던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직업이기도 했다.

하루 18시간 노동과 몸수색, 추억 속 모습과 달랐던 현실

1975년 개봉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는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는 주인공 영자가 등장한다. 도시로 올라와 여러 일을 전전하는 젊은 여성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당시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녔는지 보여주는 문화적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 속 영자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일하던 중 사고를 당한다. 이는 영화의 극적인 설정이지만, 버스 안내양에게 신체적인 위험이 존재했다는 당시의 노동환경과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 시내버스에서는 문이 열린 상태로 운행하는 일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승객이 몰리던 시절 안내양이 출입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손잡이에 의지해 이동하는 장면은 당시를 기록한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1960~1970년대 버스 안내양들의 노동시간이 평균 18~21시간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근무 형태는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방식인 경우도 있었다. 장시간 근무와 부족한 수면, 차량 내부의 좋지 않은 공기 때문에 건강 문제를 겪기도 했다.

일을 마친 뒤 편하게 쉴 공간조차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버스회사에서는 숙소와 세면장, 화장실 같은 기본적인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금 수준도 높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은 1966년 버스 안내양의 평균임금이 약 2,400원이었던 반면 당시 제조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약 8,100원이었다고 소개한다. 서로 다른 직종과 근무 조건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장시간 노동에 비해 안내양의 경제적 처우가 열악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힘든 노동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 일도 있었다. 바로 몸수색이었다.

당시 버스 요금은 안내양이 직접 승객에게 받았다. 회사 측에서는 안내양이 요금의 일부를 빼돌릴 수 있다고 의심했고, 이런 일을 막는다는 이유로 근무를 마친 직원의 몸을 수색하는 관행이 존재했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남성 직원이 여성 안내양의 몸을 수색해 심각한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했다. 안내양들은 하루 종일 버스에서 차비를 받으며 일한 뒤에도 회사에서 도둑 취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했다.

버스 안내양의 역사를 다룬 연구에서는 몸수색과 요금 계수기 문제가 노동자들의 항의와 저항을 불러온 중요한 쟁점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해야 하는 서비스 노동자였지만, 정작 자신들의 권리와 안전은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다.

 

승객과의 관계도 언제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혼잡한 버스에서는 요금 문제로 다툼이 발생했고, 술에 취한 승객에게 욕설을 듣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손님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요구와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 대응해야 하는 현실이 함께 존재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의 평균 연령은 매우 낮았다. 국가기록원은 평균 연령을 약 18세로 소개한다. 오늘날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직 어린 나이에 가까운 여성들이 도시의 혼잡한 교통 현장 한가운데에서 생계를 책임졌던 셈이다.

이들은 도시가 성장하면서 늘어난 이동 수요를 감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기억하는 활기찬 출발 신호와 안내양들이 실제로 겪은 생활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었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자 무엇이 달라졌을까?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은 1982년에 찾아왔다. 그해 9월 10일, 승객이 직접 요금을 내는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했다.

이전에는 안내양이 승객에게 요금을 받고 승하차를 관리했지만, 새로운 방식에서는 승객이 버스에 오르면서 요금함에 차비를 넣도록 했다. 운전기사 한 명이 차량을 운행하고 승객이 요금을 직접 내는 방식이 확대되면서 안내양의 역할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버스 운영 방식을 흔히 원맨버스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운전기사 외에 별도의 차장을 두지 않는 구조다.

차량 구조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승객이 앞문으로 타면서 차비를 내고, 뒷문으로 내리는 방식이 확산되면서 승하차 흐름을 관리하는 방법이 달라졌다. 요금을 직접 받거나 출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별도의 안내양을 둘 필요가 점차 줄어든 것이다.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모든 버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버스회사가 차량을 교체하고 새로운 요금 징수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존에 근무하던 안내양의 고용 문제도 함께 발생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이 확대될수록 안내양을 채용할 이유는 약해졌다. 버스회사는 인건비를 줄이고 운영 절차를 단순화할 수 있었으며, 승객은 직접 요금을 내는 방식에 익숙해져 갔다.

1989년에는 버스 안내원을 두도록 규정했던 자동차운수사업법의 관련 조항이 삭제되었다. 버스 안내양 제도가 사실상 역사 속으로 물러나는 법적 변화였다.

 

안내양이 줄어든 뒤에도 버스는 계속 발전했다. 현금 요금함과 회수권을 사용하던 시기를 지나 교통카드가 보급되었고, 이후에는 교통카드 단말기와 버스정보시스템이 일반화되었다.

지금은 버스에 오를 때 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정류장 안내는 음성 방송과 전광판을 통해 확인한다.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는 휴대전화 앱으로 미리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안내양이 담당했던 업무 가운데 일부는 요금 징수 장치와 차량 설비, 안내 방송 등으로 대체되었다. 반면 혼잡한 차량 안에서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고 돌발 상황에 대응하던 역할은 기계로 완전히 옮겨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늘날 버스기사 역시 운전 외에 승객의 승하차와 안전을 확인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승객의 안전 문제는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사라졌다고 함께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버스 안내양 제도의 폐지는 기술과 운영 방식의 변화가 직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그 변화를 단순히 사람이 기계로 대체된 사건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안내양 제도가 사라진 배경에는 인건비와 운영 효율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의 처우, 도시 교통정책, 승객이 요금을 지불하는 방식의 변화가 함께 있었다.

버스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게 되면서 바뀐 것은 단순한 승차 절차만이 아니었다. 한때 수많은 젊은 여성의 생계수단이었던 직업의 미래도 그 과정에서 달라졌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라이”라는 목소리만이 아니다

버스 안내양을 떠올릴 때면 오래된 버스 사진과 함께 문을 두드리며 외치던 “오라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 장면은 이제 한국의 옛 대중교통을 상징하는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많은 안내양은 어린 나이에 도시로 올라와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혼잡한 버스에서 오랜 시간 일했다. 버스가 도시의 일상을 연결하는 동안 그 안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노동이 있었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한 뒤 버스 안내양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오늘날에는 교통카드와 자동문, 정류장 안내 시스템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에는 누군가가 직접 차비를 받고 승객을 안내해야 했다.

버스 안내양의 역사는 사라진 직업에 대한 추억이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이용하는 교통 서비스가 누구의 노동 위에서 발전했는지 돌아보게 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참고 자료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버스안내양」

국가기록원, 「여성기록전시콘텐츠 - 생계와 경제성장의 최일선에 서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18시간, 만원 버스 그리고 몸 수색」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통수단의 변화와 직업」

조민지, 「1960~70년대 버스안내원 직종의 여성화와 '여성적인' 서비스의 의미」, 여성학연구, 2024